INSIGHT
“발은 땅에 두고, 팔은 별을 향해”
한국형 피지컬 AI의 내일을 그리다
2025.11.27
“발은 땅에 두고, 별을 향해 팔을 뻗으라.”
피지컬 AI 인터내셔널 포럼 2025의 마지막 토론에서 나온 이 문장은 행사장을 잠시 멈추게 했습니다. 수십년의 공장 경험과 함께 쌓인 세계 제조강국이라는 ‘단단한 기반’에, 이번에는 피지컬AI라는 신기술을 합쳐 더 높은 이상을 향해 가겠다는 대한민국의 목표가 정확히 그 안에 겹쳐 있었기 때문이죠.
2025년 11월 20일, 서울 코엑스. 이날 오전 세션에는 정부 정책 설계자, 제조 현장을 연구해온 교수, 로봇 엔지니어, 그리고 스마트 공장 현장 리더까지 다양한 전문가들이 모였습니다. 한국형 피지컬 AI가 어디까지 왔는지, 또 앞으로 무엇을 목표로 어떤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지 각자의 언어로 풀어냈습니다.
💼 정부가 그리는 피지컬 AI 설계도

박태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보통신산업정책관
첫 번째 키노트 연사로 무대에 오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박태완 정보통신산업정책관의 첫마디는 단호했습니다.
“민간이 어떻게 뛰어야 하는지는 민간이 더 잘 압니다. 저희가 할 일은 기업이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길을 미리 닦아놓는 것입니다.”
박 정책관이 말한 ‘길’은 하나의 정책이 아니었습니다. GPU 26만 장으로 상징되는 AI 인프라, 10조 원 규모의 국가 AI 투자, 피지컬 AI를 포함한 월드 모델 전략까지. 흔히들 말하는 ‘국가 백년대계’에 걸맞는 긴 호흡의 설계도였죠.
전북·경남·대구로 이어지는 지역 거점 구상도 눈에 띄었습니다. 제조업이 강했던 지역에 AI 데이터센터와 테스트베드, 실증 클러스터를 연결해 피지컬 AI의 실험장을 만들겠다는 구상입니다.

박 정책관은 세 가지 키워드를 강조했습니다:
첫째, 개방. 기술과 데이터를 소수 대기업에만 쌓아두지 않고, 스타트업과 중소 제조기업까지 함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둘째, 안전. 사람과 협업하는 로봇이 늘어날수록 안전 규제와 검증 체계가 촘촘해져야 한다는 점.
셋째, 사람. 현장 기술자가 AI를 다루는 언어와 도구를 익힐 수 있도록 교육과 전환을 지원해야 한다는 점.
“인공지능이 코드와 데이터를 벗어나 사람 곁으로 걸어 나오는 시대입니다. 그때 필요한 인프라와 제도를 준비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입니다.”
🏭 제조 AI의 진짜 언어

제이 리(Jay Lee) 메릴랜드 대학교 클라크 석좌교수
두 번째 키노트 연사 메릴랜드 대학교 제이 리(Jay Lee) 클라크 석좌교수는 제조 현장에서 평생을 보낸 연구자답게 담백하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AI가 한 번 멋지게 성공하는 장면은 학회에서는 박수를 받습니다. 하지만 공장에서는 다릅니다.”
공장은 어제, 오늘, 내일도 똑같이 잘 돌아가야 하니까요.
리 교수는 제조업 AI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정확도(Accuracy)보다 재현성(Repeatability)과 신뢰성(Reliability)이 중요합니다.”
AI가 ‘특정 상황’에서 높은 정확도를 보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건데요. 다른 날, 다른 조를 거쳐도, 설비 특성과 환경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품질’이 제조 현장의 언어라는 겁니다.
리 교수는 제조 현장의 AI 구현에 필요한 ‘3D’를 강조했는데요.
첫째, 도메인(Domain). 도메인은 공정과 설비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베테랑 작업자들이 몸으로 알고 있는 지식을 AI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옮기는 작업이죠.
둘째, 데이터(Data). 데이터는 현장의 기록입니다. 리 교수는 “많은 데이터가 곧 좋은 데이터가 아닙니다.”라며, 정의된 문제에 제대로 초점을 맞춘 정제된 데이터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셋째, 디시플린(Discipline). 디시플린은 규율입니다. 모델 하나 잘 만드는 것보다 조직이 AI를 다루는 방식을 바꾸는 게 ‘진짜 디시플린’이라는 게 리 교수의 설명입니다.

“한국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도메인과 숙련을 갖춘 나라입니다. 그 위에 데이터와 디시플린이 얹히면 피지컬 AI 시대에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 로봇이 넘어지면 진짜 부서집니다
다음 키노트 연사로 무대에 오른 UCLA 데니스 홍 교수는 특유의 유머로 분위기를 환기시켰지만, 메시지는 묵직했습니다.
“텍스트 기반 AI는 거짓말을 해도 그 문장을 지우면 끝입니다. 세상이 부서지지 않아요. 하지만 로봇은 넘어지면 진짜 부서집니다. 때로는 사람도 다칠 수 있습니다.”

데니스 홍 UCLA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교수
최근 로봇 제어가 엔드투엔드(End-to-End, 입력부터 출력까지 하나의 시스템으로 학습하는 방식) 방식으로 발전하면서, 로봇이 스스로 학습해 ‘잘’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하지만 정작 그 과정을 사람이 이해하거나 설명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 홍 교수의 지적입니다.
“우리는 지금 설명하기 어려운 ‘잘 하는 로봇’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우리가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을까요?”

홍 교수는 피지컬 데이터를 “몸으로 배우는 데이터”라고 표현합니다. 힘, 마찰, 충격, 균형, 반작용. 실제 로봇이 겪는 모든 물리적 경험이 여기에 포함되죠. 문제는 이 데이터를 모으는 과정 자체가 비용과 위험을 수반한다는 점입니다.
시뮬레이터 안에서는 수만 번의 실패가 허용되지만, 실제 설비에서는 작은 실수도 큰 파손으로 이어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완전한 자율 로봇을 지향하기보다, 사람과 로봇이 함께 일하는 구조가 당분간은 더 현실적인 경로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어요.
“사람이 잘하는 것과 로봇이 잘하는 것을 냉정하게 나누고, 그 사이를 잇는 인터페이스를 설계하는 것이 피지컬 AI 시대의 진짜 디자인입니다.”
🌐 피지컬 AI의 신경망을 잇다

필립 제라르(Philippe Gerard) 노키아 네트워크 인프라 아태지역 신흥사업 총괄
필립 제라르(Philippe Gerard) 노키아 네트워크 인프라 아태지역 신흥사업 총괄은 피지컬 AI의 또 다른 핵심 키워드로 연결성을 꺼내 들었습니다.
데이터센터에서 거대한 모델이 학습되고, 공장 엣지에서는 실시간 의사결정을 내리는 소형 모델이 작동하며, 로봇과 드론, 센서가 쉴 새 없이 데이터를 주고받는 구조.
대규모 데이터센터는 뇌에, 현장의 엣지 디바이스는 손과 발에, 네트워크는 그 사이를 잇는 신경과 혈관에 비유할 수 있어요. 어느 한쪽이라도 끊기면 전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거죠.
제라르 총괄은 특히 양자 컴퓨팅 시대를 대비한 보안 전략을 강조했습니다.
“양자 공격을 전제로 한 보안 설계는 선택이 아니라 선행 과제입니다.”
피지컬 AI가 산업·에너지·물류 인프라에 깊이 들어갈수록 보안의 실패는 물리 세계의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로봇은 넘어지면 진짜 부서진다”던 데니스 홍 교수의 말처럼, 실제 사고로 이어지기 전에 ‘예방’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게 제라르 총괄의 설명입니다.
🚗 공장이 스스로 움직이는 시대

현대자동차 E-Forest 센터장 이재민 전무
현대자동차 이포레스트(E-Forest) 센터장 이재민 전무는 제조업의 오늘을 “기정학(技政學)의 시대”라고 표현했어요. 지정학 요인이 국제 관계와 정치, 경제, 안보에 큰 영향을 미치던 종전과 달리, 이제는 기술과 반도체, 데이터 주권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라는 의미인데요.
그렇다면 제조 강국으로서 한국은 이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요? 이재민 전무가 소개한 현대자동차의 DF247 프로젝트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공장 자동화를 넘어, 제조 기술 자체를 국가 경쟁력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인데요.
DF247은 흔히 말하는 ‘불 꺼진 공장’보다 훨씬 입체적인 개념입니다. 위험하고 반복적인 작업은 자동화하고, 사람은 감독·설계·의사결정 역할로 이동하죠. 공장이 디지털 트윈과 소프트웨어 기반 제어를 통해 훨씬 유연하게 변하는 구조라는 게 이 전무의 설명입니다.
“공장이 상황에 따라 스스로 재구성되는 시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토론에서 더 선명해진 과제들

이어진 패널 토론에서는 앞선 발표에서 미처 다 풀지 못한 현실적인 고민들이 솔직하게 오갔습니다.
먼저 현대자동차 이재민 전무가 완성차 공장 최적화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협력사 공장과 공정이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 병목은 다른 곳에서 생깁니다. 데이터는 벽을 넘을 때 가치가 커집니다.”
여기에 답하듯 제이 리 석좌교수가 데이터 공유의 규칙과 신뢰할 수 있는 중립 플랫폼의 필요성을 덧붙였는데요. 기업 간 데이터를 공유하더라도 기술과 경쟁력이 노출되지 않는 설계, 중소 기업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인프라가 중요하다는 지적입니다.
데니스 홍 교수는 학생들에게 실패를 겁내지 않도록 하는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습니다.
“학생일 때는 많이 넘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하지만 산업 현장에서는 넘어지면 안 됩니다.”

🌟 한국형 피지컬 AI, 이제 시작입니다
토론이 진행될수록 연사들의 키워드가 하나로 엮여 갔습니다. 정부는 길을 닦고, 학계는 방법론과 인재를 준비하며, 산업 현장에서 기술을 검증하고 확산시키는 구조. 피지컬 AI라는 거대한 변화를 앞두고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합의가 조용히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공장 바닥의 먼지와 서버룸의 팬 소리, 연구실의 화이트보드, 정책 문서의 활자가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한국형 피지컬 AI가 첫걸음을 내딛는 것일지도 모릅니다.